한국 전통 가옥

고성 왕곡마을, 함경도식 전통 가옥이 남한에?

findusefulinfo 2025. 5. 5. 15:00

한국의 전통가옥은 지역마다 서로 다른 기후와 지형, 생활양식에 맞게 진화해 왔다. 그러나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에 위치한 왕곡마을은 전혀 다른 특별함을 지닌다. 이곳은 남한 땅임에도 불구하고 북한 함경도식 전통가옥이 집단적으로 보존된 유일한 마을이다. 외관만 보면 남한의 일반 한옥과 유사해 보일 수 있으나, 그 구조와 재료, 공간 구성에는 북방의 혹독한 겨울과 실용 중심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왕곡마을의 가옥은 단순한 전통 건축물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의 아픔을 딛고 자신들의 삶과 문화를 지켜낸 실향민들의 자취이다. 이곳에 머무르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 그리운 삶의 양식을 새롭게 심고, 전통과 기억을 공간으로 부활시킨 인간의 끈질긴 문화적 집념을 느낄 수 있다.


실향민이 만든 왕곡마을 – 함경도 사람들의 정착과 문화의 이식

 

왕곡마을은 1950년대 초 한국전쟁 직후,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모여 조성한 마을이다. 이들은 낯선 땅에 정착하면서도, 고향 함경도의 생활 방식과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자 스스로 집을 짓고 마을을 형성했다. 정부 주도 개발이 아닌, 실향민 스스로 터를 잡고 만든 이 마을은 초기부터 함경도 출신 주민들로만 구성되어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했다.

함경도 출신 주민들은 자신들이 익숙했던 북방의 전통가옥 구조, 억새로 엮은 초가지붕, 내부 온돌 설계 등을 그대로 재현했다. 이것은 단순히 주거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한 문화적 복원 작업이었다. 실제로 왕곡마을의 설계 배치와 가옥 형태는 남한의 여느 마을과 달리, 집들이 좁게 모여 있고 낮은 담과 비좁은 골목이 이어지며, 집과 집 사이에 이웃 간 교류가 활발한 북방식 집성촌 구조를 띠고 있다.

왕곡마을은 2000년대에 들어서며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오늘날까지도 20여 채의 전통가옥이 보존되고 있다. 실향민들이 이룩한 공동체적 건축과 문화 전통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유일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고성 왕곡마을, 함경도식 전통가옥이 남한에?


함경도식 전통가옥의 구조 – 북방형 한옥의 특징을 담다


왕곡마을의 가옥은 일반적인 남한 한옥과 여러 면에서 다른 구조적 특징을 보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붕 재료와 형태이다. 남한 대부분의 전통가옥이 기와 또는 짚으로 초가를 얹는 데 반해, 왕곡마을의 집들은 억새나 띠풀로 만든 이엉을 얹은 초가 형태로 북방의 건축 전통을 계승한다. 억새는 함경도 지방에서 흔하게 쓰이던 재료로, 단열 효과가 뛰어나 겨울철 한파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가옥의 배치 구조 역시 독특하다. 대부분의 가옥이 ‘一자형’ 또는 ‘ㄱ자형’ 평면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공간을 기능 중심으로 단순하게 나누는 실용적 설계를 보여준다. 마루보다 방의 비중이 크고, 특히 방 내부는 온돌 중심의 난방 구조로 설계되어, 가족이 한 공간에서 따뜻함을 나눌 수 있게 구성되었다.

이 마을 가옥의 또 다른 특징은 낮은 처마와 낮은 천장 높이다. 외부 바람 유입을 최소화하고 내부 보온성을 높이기 위한 방식으로, 북방의 건축 전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는 남한 중부나 남부 지방의 한옥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구조다.


왕곡마을의 민속적 가치 – 문화재로 지정된 생활 유산


왕곡마을은 단지 오래된 가옥이 있는 마을이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생활하는 '살아 있는 민속 마을'이다. 1990년대부터 강원도와 고성군이 보존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마을 전체가 ‘강원도 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관광자원으로도 점차 조명받으며, 북방 문화와 실향민 역사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마을에서는 해마다 왕곡전통민속축제가 열려, 전통 세시풍속, 민속놀이, 이북 음식 문화 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단순히 옛날 가옥을 복원한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삶의 방식, 사고방식, 공동체 문화가 온전히 살아 있는 마을이라는 점에서 민속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함경도 방언과 관습, 음식문화까지 남아 있다는 점은 왕곡마을을 단순한 건축 유산이 아닌 통합적 생활 유산으로서 보존 가치를 높여주는 요소다. 이곳은 남한에 남겨진 유일한 북방 문화의 보존지로, 분단 이후 단절된 문화를 회복하는 데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현대사회에서 왕곡마을이 가지는 의미 – 분단의 기억과 통합의 가능성


왕곡마을은 단순한 건축 보존지가 아니라, 남북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간직한 공간이기도 하다. 실향민들이 만든 이 마을은 고향을 떠나야 했던 아픔의 기록이며, 동시에 이북 문화를 남한에 정착시킨 민족적 연결성의 상징이다.

현대 사회에서 이 마을은 남북 간 문화 교류의 상징적 거점으로서도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왕곡마을은 여러 학교의 민속 교육 장소로 활용되며, 학생들이 직접 전통가옥을 체험하고, 북방 문화를 학습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전통문화의 현대적 계승과 동시에, 분단 세대와 통합 세대 간의 문화적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귀중한 자원이다.

더 나아가, 왕곡마을은 지속 가능한 지역관광, 생태문화 콘텐츠 개발, 전통문화 창작 기반으로서도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단지 옛것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숨 쉬는 문화의 장소로서, 세대를 넘어 계승될 전통을 품은 공간이다.